읍성들은 조선시대에 와서 다시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조선왕조 건국 과정에서 급하게 쌓느라 절반 이상을 토성으로 쌓았던 한양 도성도 세종 때에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석성을 축조함에는 성돌을 자연 그대로 사용하는 방법이 있고 정연하게 다듬어 축조하는 경우가 있다. 산성에서는 자연석을 이
성곽을 말하게 됨으로 전통건조물이라고 불려져야 될 것으로 보인다.
2. 성곽의 기원
우리나라에는 수많은 성곽이 남아있다. 높은 산에는 산성이 있고 야트막한 산에는 토성이 있으며 평지나 바닷가에서는 읍성의 성벽이 있다.
이러한 성곽유적은 우리조상 들이 삼국시대 이래 끊임없이 이어진
삼국시대 석성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 기법으로 통일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시대 한양 도성을 축조할 때에도 전반적으로 이용된 것을 현존하는 성곽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석축의 하부를 가장 수직에 가깝게 쌓고, 중앙부는 완만하게, 다시 상부는 치켜세우는 방법이다.
서울 성곽은 대체적으
삼국시대의 밀집분묘군으로 반출된 유물로 보아 대략 5세기 후반의 것으로 추정된다. 1981년 부산대 박물관이 조사하였는데, 파괴가 심해 자체의 성격 파악도 곤란하다. 우구는 모두 무덤으로서 삼국시대의 구덩식장방형돌덧널무덤 34기와, 조선시대의 나무 널무덤 4기가 조사되었다. 돌덧널무덤 중 7호
조선 점령 서막이 되었다.
한강?예성강?임진강의 3대 하천 어귀에 있으면서 서울의 관문이었던 강화는 이러한 수난에 대항하면서 상처 투성이의 땅이 되었다. 한국사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강화도에는 고인돌 등의 선사 시대 유물을 비롯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마니산 참성단, 신미
산성과 보통 때 통치 집단이 거주하는 주거성인 궁성이 서로 면밀한 관계를 가지고 병존하였다. 통구시대의 국내성과 위나암성, 평양 시대의 안학궁성과 대성 산성은 평성과 산성을 함께 갖춘 고구려식 수도의 면모를 잘 보여준다. 이런 이유 때문에 궁성의 뒤에 있는 궁성의 위치는 산성의 위치와 유
조선의 인조는 일시 강화로 피난하였다가 환도하였다. 이어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는 또 다시 김상용 등으로 하여금 세자빈․봉림대군․인평대군과 함께 강화로 피난하게 하고, 강화로 가는 길목이 막힌 자신은 남한산성에 들어가 농성을 하였다. 하지만 강화성이 함락되자 하는 수
시대 이래 승주의 세력이 1018년을 전후하여 크게 위축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반면에 지금까지 승주의 임내이던 낙안군과 곡성군 등이 승주보다 거리가 훨씬 먼 나주목의 임내로 이속된 것은, 백제와 고려의 쟁패기부터 이미 왕건의 세력 근거지로서 고려왕실과 특수한 관계에 있던 나주세력이 그
막기 위해 집단 주거지 둘레에 판 좁고 긴 도랑 형태)에서 비롯되었으며 정복 사업이 본격화하는 4세기경에 산성으로 발전한 것 같다. 특히 삼국시대삼국간의 직접적인 마찰 및 대립과 이해가 상충되는 곳에는 전투가 많아 산성을 구축케 했고 평지성에 비해 산성이 압도적으로 많이 축조되었다.
성곽은 거점 성을 중심으로 방사상으로 분포하고 있다. 한강이북지역의 성곽은 동서로 발달된 하천과 남북으로 발달된 산맥으로 인한 지형상의 이유로 주요 교통로를 통제할 수 있는 요지에 중심 성으로 성곽이 분포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지역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지역이고 백제와 고